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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할 수 없는 아티스트,  데이브 클락

정의할 수 없는 아티스트, 데이브 클락

90년대 초반 이후, 테크노 장르에 수많은 기여를 해온 ‘테크노의 남작’ 데이브 클락

Words: Hernán Pandelo / Binna Kim (번역)

인터넷과 기술혁신의 등장으로 똘똘 뭉치게 된 오늘날의 일렉트로닉 씬에서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음반에서 느낄 수 있는 세계관을 통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도 캐치해내는 그의 예민한 감수성을 엿볼 수 있다. 데이브 클락(Dave Clark)은 30년 넘게 일렉트로닉 음악의 선두주자로 테크노 씬을 이끌어 왔다.

 

ADAPTATION

암스테르담 댄스 이벤트(ADE)에서는 아티스트들과 우리 같은 기자들이 미팅을 갖기 위해 주로 이용하는 독특한 행사장인 드라마르(DeLaMar) 씨어터가 있다. 이곳에서 우리 DJ Mag Asia팀은 데이브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내 삶이 변하기 시작했다”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데이브는 몇 년 전에 네덜란드의 수도로 이사했고, 지금까지 조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여기로 이사 온 뒤,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더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암스테르담은 나무가 많은 푸른 도시로 보다 건강하게 살 수 있고, 나는 이곳에서의 삶을 더 즐기고 있다. 이 작은 타운 안에서 대도시의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정말 멋진 공항도 있다. 나는 전 세계적으로 싱가포르와 홍콩의 공항 다음으로 스히폴 공항을 가장 좋아한다. 게다가 도시에서 불과 20분 거리에 있다. 기차도 있고, 트램도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곳에 살면 참 좋다. 내가 본 도시 중 가장 멋진 도시이고, 고향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해준다.”

데이브는 8~10년 정도 ADE의 소속 어드바이저로 근무했으며, 14년 동안 이 행사에 참가해왔다. “ADE가 도시에 가져다 주는 이점들을 생각하면 정말 자랑스럽다. 일렉트로닉 음악을 존중하고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 도시의 개방적인 성격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이어서 그는 “ADE는 이 씬을 정식으로 인정해주는 행사이다. 유럽 지역에서 가장 적절한 장소에 개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것을 좋아한다! 감동적인 도시이고 한 미팅 장소에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데 15분이면 충분하다.”

그는 2018년 ADE에서 재미있는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우리와 인터뷰를 하던 당시 그는 이미 세 개의 패널에 참가할 예정이었고, 그 다음날에는 그가 1년에 걸쳐 일주일에 몇 번씩 주기적으로 강의하는 사운드 엔지니어링 학교의 강연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는 또한 흥미로운 인터뷰도 하나 준비하고 있었다. “장 미셸 자르(Jean Michel Jarre)를 인터뷰할 예정인데, 내겐 참 설레고, 꿈과 같은 일이다. 그는 내가 어린 시절에 일렉트로닉 음악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노하우를 알려준 정말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음악에는 내 마음을 열게 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라고 자랑스럽게 그가 말했다. 도시의 신화적인 지역, 멜크웨그에서 열리는 ADE 기간 동안, 이곳 저곳에서 참가하기로 약속된 세션들은 물론, 데이브 자신이 주최하는 이벤트도 예정되어 있었다.

일렉트로닉 음악의 역사가 그에게 깊게 스며들었고, 그는 일렉트로닉 음악 역사에 깊이 스며들었다. “나는 모든 것이 아직 형성되고 있는 시기에 자랐다. 인터넷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음악이 메신저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진 미셸 자르의 고양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누구와 데이트하고 있는지, 그가 어떤 샌드위치를 먹는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런 가십거리에 관심 있어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 때는 음악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음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음악을 들으려면 돈을 써야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음악에 더더욱 전념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고른 음악이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 음악을 좋아하는 척하면서 되팔고, 다른 음악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는 그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DESECRATION

데이브는 2017년, 데뷔한 지 14년 만에 앨범 ‘The Desecration of Desire’을 발표했고, 이 앨범이 우리 대화의 주요 화두 중 하나였다. 그가 풀랭스 포맷으로 앨범을 다시 발매하기까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여행을 잘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혹자는 ‘아, 데이브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사를 갔고, 앨범 작업을 하는데 14년이나 걸렸구나?’, ‘그는 분명 (대마초도) 많이 피웠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확실히 아니었다. “내 마음 상태가 많이 변했었고, 음반 산업 또한 많이 변화하고 있었다.”라고 그는 회상했다. 기술 혁신의 소용돌이 속에서 데이브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친구에게 팔았고, 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면서 기다렸다. “암스테르담에 오니 사람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을 만나러 차를 몰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나는 비로소 제대로 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한, 레코딩 산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보는 동시에 테크닉적인 분야에서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동시에 지켜보면서 지냈다. 더더군다나 나는 음악을 만드는데 있어 다작(多作)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스튜디오를 제대로 구축하기 위해서 영감을 제대로 얻을 때까지 기다렸다. 스튜디오를 구축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라고 데이브는 자신의 기억을 공유했다.

아날로그 스튜디오에서 신기술이 접목된 스튜디오로 전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에이블톤(Ableton)을 처음 사용해보려고 시도했을 때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로직(Logic)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로직을 쓰기 시작했고, 사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여전히 매우 지겨운 작업이었고, 제대로 잘 작동하지도 않았다. 점심 먹으러 나갈 때마다 매번 프로그램에 오류가 나서 시스템을 재부팅해야 했다. 그 당시에 많은 플러그 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직을 재부팅할 때마다 플러그 인을 일일이 스캔 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점심 휴식을 한번 더 가지러 나갔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문제점을 알아냈고, 내 스튜디오의 주요 문제가 바로 내 컴퓨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새 컴퓨터를 하나 더 사서 조금 바꿨더니, 그 이후로 정말 행복해졌고 그제서야 새 앨범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마지막 큰 프로젝트인 ‘The Desecration of Desire’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이어서 그는, “앨범 타이틀과 가사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듣는 사람의 마음대로 해석됐으면 좋겠다. 내가 굳이 설명을 덧붙이고 싶은 부분은 이 앨범의 트랙 중 하나가 타이틀이 ‘Dot Forty One’인데, 이 트랙은 5번째 트랙이고, 제목을 이어 붙이면 5.41이 된다. 이 숫자는 내가 엑시트 페스티벌(Exit Festival)에서 돌아오면서 교통사고를 당했던 시각이다. 이 앨범을 듣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2016년 7월에 세르비아의 엑시트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한 후 겪었던 사고에 대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잇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풀랭스 포멧으로 앨범을 하나 더 발매하려면 14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지 물어보았더니, 그는 그의 전형적이고 잔인 무도한 정직함으로 대답했다. 그가 말하는 스타일이 어떤지 알고 있다면 놀랄만한 대답은 아닐 것이다. “14년 후에 살아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 살아있다면, 분명 여전히 작업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사실 잘 모르겠다.”라고 선뜻 말을 내뱉었다가 다시금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을 이어가기를, “나는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일을 강제적으로 하고 싶지 않다. 굳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음악을 만들 필요가 없다. 음악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만들고 싶다. 앨범 발매 일정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래서,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년에 나는 스튜디오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그렇게 많이 느끼지 않았다. 단지 작업을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나더러 정치인이 되라는 사람들이 있어서 2020년쯤에 가니에(Kanye)에 맞서고 있는 나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아직 살아있다면 말이다… 농담이고, 누가 알겠는가? 나는 현재 내가 어떤 상태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것 같다. 언젠가 책을 쓸 계획이다. 하지만 이 씬에 관한 책은 아닐 것이다. 나는 사진에 대한 가벼운 열정을 가지고 있는데, 시간이 된다면 사진 쪽으로도 무언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시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아시아에 처음 가봤을 때를 기억하는가?

“그렇다. 1994년에 일본에 갔었고, 그때 옐로우(Yellow)라는 클럽에서 공연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아가씨 하나가 나를 케어해 주었는데,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초밥 먹으러 갈래?’라고 물었었고, 나는 ‘아, 제발, 안돼’라고 했다. 왜냐하면 나는 서양 남자라, 그들이 날 생선을 먹고 모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굴도 먹지 못했다. 영국의 전형적인 음식에서 세계음식으로 입맛을 바꾸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실제로 아시아 음식을 처음으로 즐겼던 때는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였는데, ‘젠장, 다음에 아시아에 다시 가면 이 음식들을 또 먹을 것이다’고 생각했다.”

아시아에서 받았던 첫 인상은 무엇인가?

“첫 번째 여행에서 정말 충격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여태까지 내 마음 속에서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고속철도 등과 같은 공상과학 소설에 나올 법한 이미지로만 가득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 직접 가본 순간 ‘와, 정말 구식이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당시 일본사람들은 오래된 미국 전기 스위치와 거대한 미국 전화기를 쓰고 있었는데, 정말 구식이었다. 그런 첫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 사람들은 아주 공손하고, 모든 일본 사람들이 개인 공간 존중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아서 다른 사람의 개인 공간에 쉽게 침범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고, 그제서야 일본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섬 나라들의 전형적인 삶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인들도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행동하도록 교육받은 것 같다… 하지만 일본에 가면, 정말 다들 그렇게 행동한다! 그들의 이런 예의 있는 모습을 보며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1995년인지 1996년에 홍콩에도 처음 갔었는데, 홍콩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창시절에 홍콩에서 온 친구와 같은 학교를 다녔었는데, 그때 그 친구가 홍콩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었었고, 그러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나는 홍콩에 직접 갔을 때 정말 슬퍼졌다. 홍콩이라는 나라의 진짜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다.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다…’라고 그 친구가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는데, 막상 홍콩에 갔더니 프로모터가 데리러 오지 않았고, 쓰레기 같은 히드로 공항에서 두 세 시간이나 기다려서 만난 프로모터는 정말 무례했다. 나는 매우 충격을 받았고, 내가 거기서 ‘FILTH(Failed in London, tried Hong Kong: 런던에서 실패해서, 홍콩에서 재 시작 하려는 사람들)’ 라고 이름 붙여줬던 사람들이 생각보다 아주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매우 거만했다. 거기서도 한 사랑스러운 홍콩 아가씨가 나를 챙겨주고 있었는데, 그녀는 내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보고 아주 유감스러워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는 홍콩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 뒤에도 홍콩에 두어 번 다녀왔는데 지금은 사실 아주 좋아한다. 그곳의 특별한 에너지가 좋다. 싱가포르에서도 잘 지내고 왔다.”

그러면 아시아의 씬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실제로 경험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땠는가?

“일본은 많이 바뀌었다! 서양 사람들은 순간의 삶을 살려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홍콩은 어떤 면에서 봤을 때 항상 변함 없이 똑같은 것 같다. 일본 사람들 페티시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바이닐에 대한 페티시다. 일본 사람들은 바이닐에 매우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그들은 항상 아티스트가 처음으로 발매한 바이닐을 들고 나타나 싸인을 부탁하곤 한다. 그리고 일본에는 타워 레코드(Tower Records)라는 레코드 샵도 있고, 많은 전자 제품들이 일본에서 디자인되었기 때문에 일본 테크니션들의 디테일함을 배우러 영국이나 독일에서 오기도 한다. 한 가지 변화했다고 할 수 있는 사실은, 바이닐의 중요성이 점점 감소하고 있었을 즈음에 EDM이 전체 씬을 점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전만큼 바이닐을 찾지 않게 되면서 레코드 가게에서 음반을 추천해주는 테이스트메이커(유행을 퍼뜨리는 사람_역주)가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이젠 모든 음악을 온라인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예전처럼 큰 애착을 가지고 음악을 찾아 나설 필요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음악을 사지 않아도 스트리밍 해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면서 일본의 클럽 씬도 바뀌기 시작했다. 예전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모습은 그때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변화했는가?

“나는 일본에 가는 것을 아주 좋아하고, 일본 문화에 대한 엄청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도쿄에 있으면 아주 행복하다… 오사카는 조금 덜하지만 도쿄는 확실히 좋아한다. 쿄토도 멋진 곳이다… 북쪽 섬에는 가본 적이 없다. 도쿄에 있는 것이 아주 편하다. 홍콩도 언급하고 싶다. 비록 2년 전에도 홍콩에서 공연했었고 분명 최고의 쇼였지만, 전문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는 음악적으로 그다지 언급할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도쿄는 항상 기꺼이 가고 싶은 곳이다. 비록 선구적이고 진정한 일렉트로닉 음악 씬은 과거에 비해 지금 더 작아지긴 했지만 말이다.”

 

창의력을 가르친다?

“나는 창의력이라는 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가르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자신을 다시금 의심하지 않기 위해서, 불안해하지 않기 위해서, 혹은 그런 불안감들을 다른 더 창조적인 방향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마음 가짐 말이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 창의력은 사람들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만약 이를 어떻게 발휘해야 할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 부분에서만큼은 내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April 10th,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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